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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제시한 기억작업의 단계

2021. 4. 25.

정체성의 중요성

정체성의 형성을 위해서는 과거라는 타자에 대한 망각과 기억의 과정 또한 요구된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통해 규명된 기억 구성의 내적 메커니즘에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체성은 망각과 기억이 교체되는 지난한 과정의 최종결과로 얻어진다. 망각은 과거(의 체험 또는 대 상)를 현재와 분리시키고 그 거리를 분명하게 함으로써 상실된 과거의 전모가 명백히 드러나게 한다. 이제 나는 내가 포기한 것을 정확 히 알고 그것의 타자성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그것을 나의 현재적 의식 속에 내면화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나 자신을 구성하는 본질적 부분으로 자리잡는다.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더 이상 아닌 그것에 의해 거꾸로 규정되게 마련이다. 과거의 정체성이 분명히 의식되는 과정은 바로 새로운 정체성에 의해 그것이 대체되는 과정인 셈이다. 결국 상실된 과거는 조건부 망각을 통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그렇다면 이처럼 상이한 수준의 논의가 포괄적으로 접목되는 계기는 없는가? 개인의 기억과 망각이 집단적 소통 및 전승의 차원과 수렴되는 지점이 바로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주체가 스스로에 대 해 성찰하는 의식과 관련된다. 근대 심리학 이론들은 정체성을 주로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 채 마치 고정된 실체처럼 취급해왔다. 그러나 정체성이란 타자에 대한 체험과 그로 인한 능동적인 변화 과정 없이는 형성될 수 없는 법이다. 현대 인지심리학의 구성주의 (constructivism)이론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개인은 자신의 내 면과 외부세계의 물리적·사회적·문화적 요구들 간의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주체성과 고유의 가치규범을 자각하게 된다. 이처럼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라는 타자'와 부단히 대면하는 과정에서 정립된다.

 

이와 같이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라는 타자와 과거라는 타자를,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 함께 전유함으로써 비로소 획득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은 특정 집단의 집단적 망각과 기억 과정 과거의 타자화-에 동참함으로써 그 집단에 대한 귀속감을 갖게 되고 결국 이들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이처럼 주체의 공시적인 지평과 토 시적인 지평이 함께 확대되는 과정을 통하여 시간 속에서의 자인이 연속성과 행위의 일관성이 획득된다. 바로 이러한 성찰적 주체로서 의 자기규정과 행위선도적 가치정향을 정체성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과거의 체험 또는 대상이 '상실' 되어 현재의 나로부터 멀어져갈 때 나는 심리적인 위기를 맞는다. 일차적 기억 단계에서 나는 일단 그것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버티며 상실된 그것에 대해 나르시시즘적 동일화(Identifikation)'의 심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기억이 '억압되면서 나는 점차 그것과 심리적으로 분리되어 나간다. 이는 필연적으로 '우울(Melancholie)'의 감정을 수반하고 극단적인 경우 정신질환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나는 위기를 극복해 가면서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여 상흔이 어느 정도 아물면 무의식 속에 억압된 채 항시 대기하고 있던 기어이 비로소 의식의 표면으로 소환될 수 있는 조건이 창출된다. 나는 과거를 타자'로서 대상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일차적 기억이 '이차적 기억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억압이라는 형태의 망각과 기억작업'이라는 이론틀을 중심으로 해명한다. 여기서 기억은 망각의 극복으로가 아 니라 오히려 망각의 결과로 제시된다. 즉 기억이란 망각에 대한 기 억,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망각했음을 잊지 않을 가능성이다. 기억 과 망각에 대한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이론은 임상적인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여 기억 구성을 위한 적극적 의미를 망각에 부여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억압된 과거의 진실'을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했던 그의 정신분석학이 일종의 현대화된 기억술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으로부터 반복적으로 표출되는 기억의 이미지들을 소환하여 체계적으로 재생시키는 기법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이론이 지니는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억의 '재생' 이란 개인적 기억에서도 부분적인 유효성만 을 지닐 뿐이며 더구나 다양한 집단이 각자의 특수한 기억을 보편적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경쟁하는 집단기억의 장에서 '기억작업을 통한 과거의 인위적인 '재현'이 순수한 객관성을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개인의 심리적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이를 집단기억의 문제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사회 하 적인 관점과 개념틀이 추가로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 압 이론은 재난이나 전쟁에 대한 기억과 망각에 적용될 수 있을 변 아니라, 급격한 사회 변화에 따른 문화적 절망을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기억의 억압과 집단기억의 억압을 동일한 수준에서 논의할 수는 없다. 전자는 심리적 과정인 반면 후자는 과거에 대한 상이한 관점과 해석이 경쟁을 벌이는 공적 담론의 장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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